Chater 265

"요새 너무 늦게까지 안 자는 거 아니에요?" 가맹점주 1호인 전길산의 객잔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날 밤, 임하연은 걱정이 담긴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열었다. “내일 만금전주를 만나기로 했소. 그전까진 열심히 해야지.” 본점 업무, 거래처 관리, 가맹점 관리, 조선인 향우회 회주 업무, 심지어 의창에서 날아온 다서각 관련 업무까지 처리해야 해서 정말 바쁘다. “여기, 내일 가져갈 장부에요. 잡다한 서류 정리도 거의 끝냈어요.” 임하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벌써 쓰러졌을 것이다. “전서구도 훈련하느라 고생이었을 텐데 고맙소. 어?!” 의자에서 일어나 임하연이 내민 장부를 받으려는 순간, 균형을 잃었다. “괜찮아요?!” 임하연은 바닥에 쓰러질 뻔한 나를 받아주었다. 나 정말 쓰러지기 직전이었나 보다. 그녀는 놀랐는지,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힘을 풀지 않았다. 향수 같은 거 쓰나. 그녀의 부드러운 몸 사이로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난다. 정신 차리자. 심신이 지쳤다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미안하오. 잠깐 어지러웠나 보오.” 나는 힘을 주어 일어나며 일부러 무덤덤하게 그녀와 떨어졌다. 조명에 반사되어서일까. 임하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오늘은 이만 좀 자둬요.” 임하연은 갓난아이가 위태롭게 걷는 것을 지켜보는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장부 정리도 한 번 봐야…….” “자요. 확인할 필요 없으니까.” 임하연은 한마디 더 하면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듯 옆구리에 양손을 대고 나를 노려보았다. “알았소.” 내일 만금전주 앞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이제 자야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 한구석에 있는 침대에 앉았다. “그…….” 내가 침대에 눕기 전, 임하연이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불렀다. “할 말이 있소?” “……고마워요. 내일 잘될 거예요!” 부끄러웠는지, 임하연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집무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나의 무리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나.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처음 만났을 때는 고맙다는 말도 잘 안 했는데, 정말 많이 발전했다. 나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다서각과 임하연을 구하려면, 내일 만금전주와의 만남을 잘 마쳐야 한다. 일단 자고 일어나 상쾌한 정신으로 만금전주를 만나자. ----------------------- “만금전주께서는 외손자분들과 만나고 계십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전길산 이 자식, 왠지 오늘 만나기 어렵다고 했더니, 외할아버지와 약속이 있었더구나. 바로 만날 줄 알고 긴장하고 왔는데 약간 허탈하네. 만금전주 외손자들의 후계자 경쟁이 본시험이고, 나는 곁다리로 하는 시험일 테니, 기다리는 수밖에. “어, 어디 가신 거지!” “빨리 찾아봐!” 취업 면접 기다리는 기분으로 대기하던 중,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긴장을 풀기 위해 구경해도 된다는 정원으로 나섰다. “……웬 상자가?”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큰 나무 상자 하나가 정원 한구석에 놓여있었다. 아까까지는 없었는데? 인공물을 철저히 배제한 정원에 나무 상자라니. 어색해도 너무 어색했다. “빨리 둘러봐!” “강 공자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저택의 하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정원에 들어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지? 대놓고 수상한 상자가 있는데 왜 신경을 안 쓰지? “여기엔 없어. 다른 곳인가 봐!” 하인들은 상자가 마치 없는 것처럼 그 주위만 빼놓고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정원을 나갔다. 뭐지? 단체로 연기하나. 악마의 무기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기어 다니는 상자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네. 자세히 보니, 상자 주변이 좀 뿌옇게 보인다. 신기하네. 조심스럽게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이런!” 상자 근처에 있는 이상한 나무 조각을 부러트려 버렸다. 정원에 있는 물건들은 다 비쌀 텐데. 물어달라고 하면 어쩌지. “어?!” 내가 나무 조각을 부수는 순간, 상자 안에서 놀란 소리가 들렸다. “정원 쪽 다시 한 번 찾아봐!” 상자가 움직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잠입 게임이었다면 바로 게임 오버야. 총살 확정이라고. “아, 그…….” “누구십니까.” 상자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막았다. “비, 비켜주세요.” 여자? 상자 안에서 어쩐지 굉장히 소심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 비켜줘야 하나? “비켜주시면 안 될까요오오.” 상자 안에서 간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씨! 아가씨! 어디 가셨어요! 아가씨!” “어디 항아리나 상자 같은 데 찾아봐!” “히익!” 만금전주의 가족인가. 아무래도 사고뭉치 아가씨가 술래잡기하나 보다. “오른쪽에 사람이 없군.”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는데 괜히 귀찮은 일에 엮이는 건 싫다. 나는 상자에만 들리도록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 고맙습니다아아아.” 나무 상자는 발만 조금 움직일 수 있도록 약간 들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내 오른쪽이 아니라 상자에서 오른쪽이요.” “아!” 나무 상자는 다시 방향을 바꾸더니, 이내 사람이 없는 쪽으로 사라졌다. 목소리가 어렸는데. 누구였으려나. ------------------------ “전서구를 활용한 배달 음식이라. 잘도 이런 생각을 했군.” 수상한 상자가 사라지고 얼마 뒤, 전에 봤던 총관이 찾아와 만금전주 앞으로 인도했다. “이미 있는 사업보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고, 무한에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여 찾아낸 사업이지요.” “거기에 가맹 사업이라는 것도 특이하군. 돈을 빌리지 않고, 추가로 돈을 쓰지도 않으면서 사업을 확장하다니.” “기오수구는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을 테고, 아직 무한에서 사업을 확장할 여지가 많으니, 괜찮은 사업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남의 외손자에게 소작까지 줘가면서 말인가.” 거기까지 알고 있었나. "하하……. 그래도 요새는 이문이 많이 남는다고 좋아하더군요." 가맹 사업에서 수익을 잘 내고 있다고 하지만, 이문이 남지 않았다면 전길산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업 내용은 괜찮군. ……그러고 보니, 양친께서는 고향에 계시는가?" 갑자기 부모 이야기를 꺼내다니. “돌아가셨습니다.” 감정을 담지 않고 최대한 담백하게 사실을 알렸다. “자식의 장성한 모습을 보셨어야 했을 텐데, 안타깝게 됐군.” 전혀 안타까운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소리에서는 미묘하게 반가움까지 느껴졌다. 왜 물어본 걸까. “돌아가신 부모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어본 이유는 모르겠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품고 살아가는 효자 흉내를 내었다. 만금전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사업 관련 서류와 장부들을 한동안 말없이 살펴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만금전주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왜 화기애애하게 가다가 이러는 거지. 불안했다. 마치 면접 질문에 잘 답하다가, 백수 기간이었던 경력 공백에 대해 언급당한 기분이었다. “이 사업. 문제가 있네.” 만금전주는 내 불안을 고조시키며 말했다. “어떤 문제 말씀이십니까.” “전서구 관련 장부 내용이 부실하군. 원래라면 비싼 값에 매입했어야 했는데, 장부 기록이 보이지 않아.” “제가 마침 전서구를 훈련할 수 있는 친우가 있어,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난 자네 능력을 보자고 했네. 친우의 능력이 아니라. 작은 도움이라면 모를까, 사업의 기반을 타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서는 안 되었네.” “전서구는 도움을 받았어도 사업 구상은 제가 했습니다.” “그 도움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어야지. 그랬다면 자네의 능력이었겠지. 하지만 이 장부에는 그런 기록이 없네. 그리고 그걸 지불했다고 했다면 사업을 시작하지도 못했겠지.” “……제 시험이 무효라는 말씀이십니까.” 전서구는 값비싼 존재였다. 원래대로라면 3층짜리 객잔을 매입하고, 전서구까지 사들이기엔 예산이 초과였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굴러가는 사업이 무효라는 지적이다. “왜? 억지 같나.” 억지가 아니겠어요. 애초에 그런 말은 안 했잖아. 내민 조건은 전표 한 장과 무한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었잖아. 임하연을 동원하는 것도 내 능력이었다고. 이대로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영원히 채무의 노예가 될 위기였다. 나는 만금전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소를 띤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표정.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나를 한구석으로 몰아내고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이 할아버지도 나랑 비슷한 과 같은데.’ 내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고 있다. “시종일관 칭찬을 하시다가 이런 지적을 하신 건, 따로 뜻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왜 낚싯대를 드리웠는지 말해봐. “하하, 그래. 전서구를 단순히 도움이라고 말한 자네의 억지에 대해 나도 억지를 부릴 수 있네.” “어떤 억지 말씀이십니까?” 시험의 추가 조건이라도 붙이겠다는 거냐. “내 외손녀와 맞선을 한번 보게.” ---------------- “어르신. 저는 화린이와 장래를 약속한 사이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10년 뒤에 말인가.” 그걸 또 어디서 알아낸 거야. “10년이든 20년이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어찌 큰일을 하는 남자가 결혼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내조를 해줄 사람을 구해야 하지. 내 외손녀를 소개해줄 테니, 선을 보도록 하게.” 저 엄밀히 말해선 2년 전에 결혼했습니다. 일단은 유부남이에요. “저를 상당히 좋게 봐주는 건 감사합니다. 그러나 외람되지만, 이 제안은 어르신께서 백가장주님과의 신의를 어기시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차마 사실을 밝힐 수 없으니 돌려 말하자. “10년 뒤에 결혼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게. 파혼하라는 이야기가 아닐세. 나는 오히려 자네가 백가의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내 외손녀를 주겠다는 것이야.” 만금전주는 아주 큰 선심을 쓰듯 어깨를 펴며 나를 향해 웃었다. 이게 이 세계의 사고방식인가. 어처구니없지만, 어쩌면 정말 호의일 수 있다. 당장 한국도 요새는 잘 안 보이지만, 참한 청년이 있으면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이 손녀랑 선 한번 보라고 제안하기도 했었으니까. “어르신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어찌 제가 미래를 약속한 여인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나와 인연을 맺는 히로인들을 책임지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오는 모든 여자를 다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은 아니었다. 나는 단호한 어투로 거절했다. “그럼 난 자네의 억지를 받아들일 수 없네.” 이 영감탱이가 진짜. 만금전주는 이미 넌 미끼를 문 물고기인데 빠져나갈 생각을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웃었다. 다서각을 돌려받고 싶으면 외손녀랑 결혼하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제안이야. 차라리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해가 간다. 나름 탐나는 인재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백가장주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순간 머릿속에서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어르신. 혹시 이 일련의 과정이, 지금 무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손자분들의 일과 연관이 있습니까?” 설마. 혹시. 말도 안 되지만. 아냐. 시험은 외손주 중에서 외손자만 보고 있어. 아니, 그래도 좀 이상한데. “가족의 내밀한 일을 외인이 묻는 것은 무례하군요. 하지만 내 가족과 관계를 맺게 된다면 알려줄 수도 있지.” 반쯤 정답이라는 뜻인가.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합니다. 그러나 화린이는 백가장주님의 외손녀이면서 사천당가 사람입니다.” 만금전장의 권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상대는 사천성의 패주, 사천당가다. 그냥 포기하세요. “괜찮네. 내 외손녀는 제갈세가의 아이니까.” “네?” 어디요? 제갈세가? 신기제갈(神機諸葛)할 때 그 제갈세가? 무협에서 무림세가를 다섯 개로 줄여 오대세가로 불릴 때, 꼭 언급되는 세가 중 하나. 사천성에 사천당가가 있다면, 호북성에는 제갈세가가 있다. 물론, 호북성 제일의 문파는 도가 문파의 으뜸이자, 구파일방의 한 축인 무당파다. 그러나 그건 무당파가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릴 만큼 대단한 문파여서 그렇지, 호북성에서 제갈세가의 위세가 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어머니도 허락했네. 아이를 단장시켜놓으라고 했으니. 일단 만나보고 이야기하지.” 이미 준비를 다 끝내놓은 거였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올 뻔했다. 전서구는 핑계고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외손녀와 만나게 하려고 했나 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당화린은 사천당가 직계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할까. 화린이와 헤어진 지 몇 달 만에 맞선을 본다고 편지 보내면, 분노한 독인이 만금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고 말해? 아니면 살막의 최고 유망주가 절대 그 꼴은 보지 못할 거라고 말할까. 아니면……. “저, 전주님! 아가씨께서!” 말을 고르고 있는데, 다급한 얼굴을 한 총관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아, 아가씨께서!” “그 아이가 왜?” “목각인형만 남겨두고 사라지셨습니다!” 만금전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다.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가서 찾아오게.” 만금전주는 한숨을 깊이 쉬며, 총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즉시 사람들을 동원해 찾겠습니다.” 총관은 급히 물러났다. 만금전주는 나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 외손녀는 꽤 대담한 아이입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이 상황에서 안심하라니, 참 번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제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저는 화린이와의 약속을 저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만금전주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적어도 한 번 얼굴을 보십시오. 그 아이를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래야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로 만나보기를 원하는 듯 했다.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야겠군요. 만나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리하죠.” 말을 마친 만금전주는 조금 후 다시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자네가 시험에 통과하려면, 반드시 저와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만금전주의 제안을 일단 받아들여야 시험에서도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하자.